김순풍 목사님의 부흥 집회 1559년 2월 12일 ~19일
나는 오후 버스로 친국 김상윤이와 함께 저녁부터 1주일간 개최된 부흥 집회에 참석했다. 눅 9:18~36 말씀을 보시고 '은혜의 성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서울에서 목회하신 분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에 관한 은혜스러은 말씀을 하셨다.
결혼하고 나서 친척들의 집을 인사차 방문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지금 아내는 친청에 가서 쉬고 있다. 창동이 동생이 휴가를 왔기에 같이 찬양도 하면서 지냈다 18일 나는 찬양 연습을 하고 오후 4시에 집에 오니 동생 창동이는 부대로 귀대했다고 하여 갈 때에 못 보았으니 몹시 서운하였다.
목사님은 도시에서 목회하신 분이니 우리 촌사람들의 수준은 몹시 흡족하지를 못햇을 것 같다. 집회는 은혜롭게 끝나고 19일에 가시는 날에는 개초리 삼거리까지 걸어갔으나 버스가 오지 않아 화원 목장까지 10여 리를 비바람 맞으면서 우리 성가대원과 집사님들이 환송해 드렸다. 날씨도 좋지 않았으나 모두 다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흐뭇했다. 모두가 즐거워했다.
비가 오면서 바람이 불었지만 모두다 버스가 오지 않아 걸어서 집에까지 왔다. 이것이 젊음과 농촌생활의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교사 강습회 1959년 2월 25일~28일
윤주원 전도사님의 고향인 해남군 삼산면 원진리 원진교회에서 해남 서부지역 교회 교사 수련회가 모였다.(대흥사 아래 지역이다) 24일 오후에 도착하니 근처에서 저녁에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여 나가보았다. 용문산 나운몽 장로의 전도집회였다.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라고 하였다. 전국적으로 13개조 부대인데 여기 온 것은 6조 부대라고 했다.
25일부터 우리노회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우리교회에서 참석한 선생들은 부장 김안식 집사, 교사 이승완, 김창선, 윤귀근, 이행민, 여교사는 정근애, 이경숙, 김재애, 모두 8명과 윤전도사님, 강사는 주교학, 문철수 목사, 설교학 박영남 전도사, 교육심리학, 김남현 전도사, 동화법은 박홍재 전도사, 음악은 없어서 나더러 하라고 하기에 평소 아는 것도 없고 아무 준비도 없이 1시간을 해야 하기에 우리교회에서 하던 '오리목 꼬고목'을 윤창으로 '음악은 영원히'를 불렀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데 더군다나 갑자기 부탁하니 망신이었다.
우리가 신세를 진 가정은 이상진 집사로, 모친은 문집사인데 집사님의 지극한 호의와 정성은 과분할 뿐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해남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가 문내면 원동리에서 앞 타이어가 터져 길옆으로 넘어져 모두 창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아내 입원치료 1959년 4월 23일
59년 4월 22일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병원에 갈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가지 않겠다고만 했다. 설득을 해서 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보건소에서는 진단을 해 보고는 만성 위염이라고 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일단 미음을 먹으면서 링거에 영양제를 넣어 주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입원을 하였다. 1주간을 하라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침구를 가져왔다. 나는 낮에는 날씨가 추운데도 김안식 집사님과 둘이서 벼못자리를 끝내고 저녁에는 아내의 곁에서 지냈다.
23일 오후에 병원에 갔더니 집에만 가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병원비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설득했으나 할 수 없이 가정에서 치료하자고 하고서 퇴원을 했다. 몸이 힘이 없어 천천히 걸어서 왔다. 아내의 애달픈 심정을 위로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병원비는 9천5백 원 지불했다.
가정의 어떤 누구도 평안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노부모님은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애타는 처지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내의 진정한 친구는 남편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남편인 나에게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원망도 할 수 없다.
내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은 더욱 외롭고 괴로운 마음뿐인 것 같았다. 고향 대리교회에서 믿던 믿음은 점점 식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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