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인 갑인년 9월18일~0000년 4월 13일 졸.
조선말에 관료들의 심한 부패로 1894년 조선 26대 고종 31년에 호남 지역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여. 해남에까지 그 세력이 지나가자 조부께서 부락일을 하던 때라 정부군이 내려와 동학군 가담자를 고하라고 추궁하며 심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하셨다고 한다. 조부께서는 기름 짜는 일을 하여 생활은 비교적 넉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 문중 사람 중에 사회활동을 하며 똑똑하다고 인정받은 김남길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본인들의 허락 없이 이감을 새겨 보증인으로 세워 자금을 차용하여 쓰고 상환을 하지 않음으로 본인들이 알지 못한 채무를 보증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채무를 강제로 상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부님은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가족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경제적인 문제로 자녀들은 서당에를 가보지를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후손들이 많은 타격을 받아 지식을 얻지 못했다고 선친께서 후손에게 항상 말씀해 주시고 계셨다.
김행우 집사 1879년 3월 2일~1968년 10월 7일 향년 89세
우리 가문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신 김행우 집사의 후손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천국인의 가문이다.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가문이다. 복 받은 가문이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개화된 문명을 누리지 못했지만 성경찬송을 개인의 독학으로 모두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교회 새벽종을 맡아서 치시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복을 누리셨다. 참으로 복된 봉사를 다 하셨다.
선친께서는 16세의 나이로 고당리 샛터 근처로 분가하여 사셨다고 한다. 고당교회 설립 초기에 네 분의 청년들이 예수를 믿기로 했는데 그중에 한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새로 오신 교회 조사가 돈이 필요하니 곧 갚겠다고 하면서 보증을 요청하자 믿고 보증을 해주었더니 상환을 않고 가버리자 채권자의 상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가산을 정리하여 채권자에게 다 상환하고서 일성산 아래 외딴 방아리로 옮겨 살면서 재산을 조금씩 회복시켜 고전리로 옮겨 사시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새벽종 봉사는 계속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항상 빚보증은 절대 해주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방아리에 사시면서 무오년 독감(스페인 독감이라고도 함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 발병한 독감으로 1919년 1차 대전 종말까지로 우리나라에선 740만 여명이 감염되어 그중 14만여 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됨)에 걸려 독한 한약을 드셔서 그렇게 좋던 치아를 다 잃었지만 건강을 유지시키셨다고 한다. 이때 독감으로 본부인을 번저 보내시고(48세) 고전리에 와서 재혼을 하셨다고 한다.
이때 영리한 아들 두 사람이 객지에 가서 일을 하다가 잃게 되었다고 한다. 1912년생 아들 복순은 영암 한약방에서 심부름을 가다가 거리에서 개에 물려 한방 의사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걱정 없다고 하다가 독이 온몸에 번져 21세 정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또 다른 아들 복선은 1914년에 출생하였다. 큰누나 복심 누나가 진도군 군내면 분토리로 출가해서 남편 김순환과 같이 일본에서 사셨는데 일본에 가서 목욕탕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잠자는 밤에 갑자기 도적이 침입하여 너무도 놀라 경기가 생겨 정신착란증으로 집으로 와서 치료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지메듭 관절염이 생겨 여기저기서 피부가 곪아 번지자 어느 한약방 주인이 자기에게 이 아이를 주면 자신이 고쳐서 데리고 살겠다고 달라고 했는데 차차 좋아지리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있다가 결국 20여 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당시는 치료하기 힘든 병들이었다. 부친은 낙심한 중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1937년 쌍둥이를 선물로 주셔서 많은 위로를 받으셨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밖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선친께서는 봉창문을 열어놓고 안경을 쓰고 찬송가와 성경을 보시면서 고운 목소리로 '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주안에 있는 나에게' 등 많은 찬송가를 부르시고 새벽에는 우리를 깨워 가정 예배를 드렸다. 낮에는 겨울에 소득이 없으니 집가마 짜기와 무명배 짜기를 항상 하셨고 우리도 어렸을 때 일을 같이 하였다. 큰 산이 없고 토지가 적으니 연료 해결이 가장 힘들어 연료를 구하는 것이 일과였다.
나이가 90세가 되여서도 지팡이만 짚고 1km가 넘는 갈우리 우리집과 큰아들 복술 집에 오셨다 가시기를 수차 하셨다. 참으로 감사를 드린다.
큰아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 항상 권면하시고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를 믿고 부친께서 소천하신 후에 열심히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셨다.
부모님들께서 연세가 많아져서 힘들 때 부모님을 모셨던 복래 형님 내외분이 많은 고생과 수고를 다하셔서 하나님께서 그 수고를 보답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향년 90세로 소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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