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앞 땅(밭) 소유권 문제 해결 1960년 8월 20일
고현 청년회가 설립되면서 교회 명의로 된 교회 앞밭 땅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를 여론화하고 나왔다. 오전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아 오후 4시경 문내 국교에서 모였다. 증언자로 정인수 교장(고당출신 영중교장)이 먼저 설명했다. 정교장은 "당시 내가 서기로 일했으며 회장은 고인이 되신 고평리 고병태씨였다" 그리고 설립 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이어서 "현재 김화섭 장로님이 경작하고 있는 10여 마지기의 땅에 대해서 정년회가 해산되면서 이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회에 주자고 해서 가부하지는 안건을 가지고 투표했는데 찬성이 2표가 더 많아서 교회에 주기로 결의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정원석 씨가 "교회에 보관했을 것이라"고 하시자 이순영 목사님은 '그 말은 운동장으로 두어 영구히 운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교회로의 양도 지지자들에게 약속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인수 씨, 이원영 씨, 이순영 씨, 김화섭 씨, 라중문 씨 등은 그당시 구두로 교회에 양도하기로 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일제 말에 촌지라도 땅을 놀리지 말고 곡식을 경작하라는 지시에 따라 경작하게 되었고, 그 후 얼마가 지나 김윤학 장로가 문내초등학교 교장 사무용 책상을 교회에서 학교에 기증함으로써 영구 보존에 대한 부담을 해결했다고 하였다.
밭으로 만들 때에 김화섭 씨, 김사원 씨, 정인옥 씨, 김행우 씨 등이 계셨고 밭의 경작자 선정에 대해선 1)선출제와, 2)과거에 기경하는데 공로가 많은 사람 중에서 택일하자고 하여 후자를 택하여 김화섭 씨로 되었고 밭을 매도한 것은 교회 사택을 짓기 위해 매도했다고 하였다.
교회가 부정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의혹을 제기했던 문제는 완전히 해명되어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모든 일은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농사의 흉작 1960년 10월
금년 농사는 흉작이다. 8월에 가장 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자라지를 못하고 말라 버렸다. 벼 이삭이 펼 무렵 9월에 태풍 칼멘호가 가뭄에 이어 농작물을 갈기갈기 흩어 버렸다. 벼 수확이 말이 아니다. 밭작물 역시 수확할 형편이 못 되었다. 하나님이 햇빛과 물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노력으로는 감당을 못 하게 된다. 저수지 아래는 그래도 좋았다.
"네가 가는 곳에 네 사명이 있다" 1960년 10월 23일
나는 괴로움 가운데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 시간 중에 "네가 가는 곳에 네 사명이 있다"라고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어디로 가든지 사명을 위해 일하자라고 다짐해 본다. 나의 삶을 위해 어디를 가든지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고평권 목하님 고당교회 부임 1960년 11월 9일
농산물의 소득을 높여 보려고 1960년 11월
나는 농산물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특용작물을 사다가 재배하기로 하고 여기저기 탐문하였다. 지난 10월 30일에 신평리에 가서 유채(나다나) 씨를 1되에 1천원 주고 사 왔다. 또 2홉이 더 있어서 200원을 주고 구입했다. 화원면 온수리(산촌)에 가서 이은배(초교동기인 이현배의 형)형을 찾아가 소라마메 또는 청두(마메콩)를 3되가 있어서 구입했다.
당귀씨는 주인을 만나지 못해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벼나 보리 작물을 심지 않으면 퇴비는 어떻게 할것이냐고 맞당치 않게 생각하셨다.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나는 특용 작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곡물가격은?(1960년 10월 27일)
보리 1가마 5,500원
고추 근당 450원
께 1되 500원
고당교회 청년회 조직(회지 '갈릴리' 창간) 1960년 12월 4일
교회 청년들 20여 명이 모여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나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따르기로 하고 서기는 김청수 군이, 회 명칭은 "갈릴리회"
제직들 집에서와 청년들 집에서 차조를 거두어서 떡을 만들어 친교를 가졌다. 청년 회지 "갈릴리"를 애월 발간하기로 하였다. 서기 김청수 군이 문학에 조예가 있어서 좋은 내용과 도움이 되는 글들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교회에 등사기가 있어서 인쇄하여 많은 부수를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의 수고는 칭찬받을만하다고 생각된다. 얼마동안 유지되다가 회원들이 외지로 가면서 흩어지게 되니 중단되고 말았다. 농촌은 일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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