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분을 참지 못한 비화 1963년 4월 24일
연천 전방 어느 부애에서 중대장 대위(32)의 순직
밤 피곤이 잠든 대대 당직 사관실에 중대 당지사관 소위가 카빈총과 실탄 8발을 장전하여 자고 있는 대대 당직사관 대위에게 난사를 하였다. 옆에 있던 대대 당직 부사관 소위는 놀라서 공포에 질려 뒷문으로 피신하고 말았다고 한다. 총을 난사한 중대 당직사과 소위는 자기 중대에 가서 인사계에게 태연하게도 내가 중대장을 죽였다라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라고 한다. 즉시 상급부대에 보고하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체포해 갔다고 한다.
중대 당직사관 소위는 이 전날 대대 당직사관으로부터 무슨 연유로 구타를 당하고 분에 못 이겨 궁리 끝에 이날 저녁 초소 순찰을 하였는데, 어느 초소에 이르렀을 때, '암호'하는 근무자의 수화를 듣고 '주번사관이다'. '보초 근무 중 이상 무'의 수하를 받은 후 소위는 '내가 맡겨놓은 실탄 내놓아라' 보초는 '언제 맡겼습니까' 소위는 '잔소리 말고 줘' 소위는 억지로 총과 실탄을 빼앗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소위는 허둥지둥 어떤 힘에 끌려가듯이 대대 당직사관실에 들어갔다. 그는 두리번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옆에 있던 당직 부사관 소위는 '무슨 총을 가져왔소'했다. 소위는 ' 아, 보초가 졸고 있기에 총을 빼앗아 왔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 후 다시 들어왔다.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했는지 대대 당직사관실에 다시 들어가 무서운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군율보다 감정에 따른 비운으로 이르게 된 것 같다.
25일 그 장례식에 군악대가 참여하여 장송곡을 울려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유족의 목 미인 울음바다, 군단장 김중장과 사단장 이준장의 조사와 추도사, 위로를 받으면서 15명으로 구성된 3발씩의 조포와 취침나팔소리가 구슬프게 메아리쳤다. 조문객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었다. 그 소리는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자존심만 중히 여기려고 하고 용서와 참음은 기억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장을 잃은 가정의 행복과 미래는 누가 보상해 줄까?
순간의 자존심 때문일까?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들려준 불행한 일도 적어 본다. 어느 연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사단장이 연대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연대 부대원이 모인 가운데서 사단장은 지휘봉으로 연대장의 머리를 가볍게 몇 번 때렸다고 한다. 무슨 사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연대장은 부하들 앞에서 심한 모멸감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사단장이 연대장 실에 들어오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정당방위라는 명분으로 권총을 꺼내 사단장을 향해 발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참는 마음을 가지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꾸어질 것을. 지휘관은 향상 상대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해야 하리라고 생각해본다. 어려운 일일수록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
대민 위안 공연(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1963년 8월20일~10월4일
나는 휴가가 끝나고 부대에 도착해 보니 전 대원들이 호남 지역 대민 위안 공연을(가뭄 피해) 위해 광주 예비사로 파견되어 있어서 다시 광주로 와서 군용차로 연주 중에 있던 학교로 갔다. 우리 대원은 30명으로 구성되었고 병참과 모든 지원은 31사단에서 해 주었다. 군악대원은 깔끔한 군악대 복장에 화이바가 밤을 비취는 전등불에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전남 서부지역에서 동부 지역은 다른 사단 군악대가 배정되었다.
연주 지역은 아래와 같다.
8월 25일~9월 26일 전남 10개 군 37회 연주(장소는 주로 국민학교 운동장. 취침은 교실 내)
농번기이기 때문에 밤에만 이뤄졌다.
연주(지휘 대위 강신만 군악대장)
1963년 8월 20일~10월 4일 (오후 8시~11시30분)
연주 악단은 하사관들로 이뤄짐.
제1부 (한국의 자랑 외 11곡 기악 연주)
2부 (은하수 외 13곡 성악)
3분 영화(택일)
1. 두고 온 산하 2. 마이동풍
연주 끝나고 9월 27일 제 9680부대(31사) 도착
9월 28일 CAC 특수 간부 후보생(군목 50명) 졸업식
10월 1일 광주 시가행진
10월 3일 본 대로 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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