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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택, 여름 성경학교, 부모님, 장로님

by 매운 레몬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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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장윤택 1958년 7월 3일

 약한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밭작물이 모두 즐거워했다. 피곤한 몸을 쉬는 시간이기도 하다. 집에서 쉬면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 이 시기에 서울에서 독학하고 있던 장윤택 전도사가 집에 휴가차 와서 내가 오르간 연습을 하는 줄 알고 같이 가자고 한다. 비가 와서 잠깐 쉬는 시간이라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오르간을 함께 연습을 하고 집에 왔다. 요사이 부락 젊음이들이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면서도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있는 오르간 연습을 위해 교회에 와서 연습하려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모두가 볼품없는 내가 하는데 그들도 해 보자고 모여든 것 같았다. 모두 다 한떄였다. 각기 자기 진로를 찾아 갔기 때문이었다.

 장 전도사는 적극적인 성공적인 삶을 이룬 사람이다. 고전리 우리 집 바로 앞에 살면서 당시 가정 형편이 너무 힘들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독학으로 중고를 졸업하고 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의 신학까지 마치고 나중에 서울에서 그 교단의 총회장까지 했다고 들었다. 후에 우리 교회 김동순 선생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목회를 했다고 한다.

 

고당교회 여름 성경학교 1958년 8월 11일

 1주일 동안 교회에서 여름 방학 기간에 여름성경학교를 가졌다. 반사(교사)는 12명, 학생 수는 남녀 합하여 140여 명이었다. 외부 강사를 모시지 않고 자체적으로 하였다. 목회자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현 주교교사로만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교사교육도 받지 않고 처음으로 음악 지도를 했다. 기도 준비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열의만 가지고 평소에 수집한 노래를 가지고 지도하였다. 학생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학생들이 떠들기만 하고 통솔이 되지 않아 자신을 얼마나 실망하게 했는지 말할 수가 없었다.

 학생 지도 정보력이 너무도 없었고 교사들끼리 많은 준비를 하여야 했는데도 너무도 몰랐던 것이다. 가르치는 선배가 얼마나 필요한가. 나는 기초 지식이 너무 없었고 준비를 함께 하는 것을 모르는 교육 빈곤의 결과였다. 의욕만 있었던 것이다. 교사들의 열심과 노력은 칭찬할만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수고를 기억하여 보상과 위로를 주신 줄 믿는다. 끊임없는 기도와 구상과 연구와 준비를 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여름성경학교를 끝내고 반사들과 함께 일성산 동편에 있는 박요다 전도사님의 배 밭에 가서 위로와 격려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교회학교 1년 교회 지원 예산은 1만 원, 그리고 주일학교 자체 헌금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지 못했다 1958년 8월 18일

 그렇게도 기다리던 비가 2일 전부터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농작물에 피해가 없을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체력이 달린 나는 내게 주어진 일에 항상 아쉬운 것뿐이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아침에 활동하면 몸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늦잠 자기가 다반사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전에 일하고 와서 점심을 먹고 조금 쉰다는 것이 2~3시간씩 자고 일어나야 몸이 풀린다. 부친께서는 오후에 일할 시간이 얼마나 되겠냐고 늘 염려하시고 독려하신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비가 올 때는 가마니 짜기와 새끼 꼬기를 해야 한다고 독려하신다. 겨울에는 낮에는 지붕을 덮을 마람(이엉)을 준비하고 저녁에는 새끼 꼬기를 했다. 벼 수확이 끝나면 지붕을 새로이 덮어야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겨울에는 길쌈에 전력을 다 했다. 점점 새로운 모직물이 생산되면서 면제품은 사라져 갔다. 태풍이 지나가면 병충해가 극심하여 병충해 약을 시기에 맞추어 농약을 살포해야 수확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런 힘든 농촌이 너무 힘들어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재정력이 부족한 우리는 몸으로 때워야 만 했다. 복래 형님과 장동이 동생이 군 복무 중이고 나는 부모님과 형수와 있으면서 너무도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지 못했다. 1958년 8월 18일 저녁부터 성가 지도를 맞게 되었다.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

 

정인옥 장로님 1958년

 고평리에 사신 분이시다. 장로님은 일제 말에 문내면 면장으로 재직하셨다. 성격이 불 같았다. 눈썹이 호랑이 눈썹 같았고 앉았기만 하면 잠을 자는 분이었다. 그러나 주민들로부터 비난받을만한 삶은 없었다. 그분은 영명중학교 교장으로 계셨던 정인수 교장의 친 형님이시다. 그런데 성격이 매우 다르다. 내게는 어머니 홍 씨로 해서 외삼촌 관계이시다.

 그래서 외삼촌들께서는 우리를 매우 아끼셨고 좋아하셨다. 성격이 적극적이고 판단력이 탁월하여 존경받는 분이셨다. 일제 강점기에 면장을 했다는 경력 때문에 주민들로부터는 인기가 없는 편이었지만 그분의 믿음과 열심은 존경할만한 분이셨다. 

 나이가 들면서 믿음의 삶을 위해 열심을 다 하셨다. 나중에 장로로 시무 하셨다. 과단성 있는 분이었다. 호랑이 상으로 너무도 훌륭하신 어르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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