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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문내면 고당리, 기독교의 선교지 고당교회

by 매운 레몬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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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고당 고전 고대 고평)

 선조들은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서 고당리 일성산 아래 샛터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되었다. 샛터에는 좋은 지하 생수물이 있다. 이곳에 당집이 있어 고당이라고 아혔다고 한다.

 백제 때는 세금현에 속했고 통일 신라 때는 양무군 영현으로 개칭되고 고려 태는 해남으로 고쳐 영암군에 편입되고 1409년 조선시대는 진도현과 합하여 해진 현이라고 했다.

 1437년에는 현감을 두고 수근 전라도 지사를 우수영에 두어 해상 방비에 힘썼고 1805년 현이 폐지되면서 해남군이라 하였다.

 고당 또는 고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고현은 옛날 현청의 소재지인 일성산 아래에 산재한 마을을 총칭하여 당악현의 고재지로 불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당악현은 황원형과 진도현이 병합하게 되어 생긴 것이며 고현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현재의 신안군의 다도해와 해남 일부를 통틀어 황원현이라 부르고 현청 소재지를 고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437년 1448년까지 물자를 수송하는데 불편을 느낀 진도현이 1449년 단독 분리 됨에 따라 해남현에서도 해남 서부 지역을 분리하여 종전과 같이 당악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450년부터 행정 조정의 필요로 육군은 강진 병영을 중심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해군은 우수영을 중심으로 수사를 배치하게 됨으로 당악현은 자연적으로 폐쇄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천주교 자리가 옥대지였다고 한다. 고당리 서쪽에는 일성산에서 흐로는 작은 냇가가 있고 고려 말에 방풍림으로 심어진 5백년이 넘은 팽나무가 냇가 양쪽으로 약 300미터 정도가 아름답게 남아있다.

 1980년경 한해로 극심한 이 지역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때 화원면에 신지 저수지를 조성하여 황산면 옥동까지 3개 면의 물 공급을 해결해서 영농에 너무 좋아졌다. 또한 영암 바다와 해남 산이면, 그리고 화원면 별암리로 연결하는 제방을 조성하여 영산강 물을 유입해 농업용수로 쓰게 되고 목포를 가는데 배를 타지 않고 차량으로 목포를 거쳐 광주 등 내륙으로 자유롭게 다니게 되었다.

 이곳을 오늘날 공사를 했다면 다리를 놓아 해산물 수익을 높이고,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여기 바다는 질이 좋은 낙지, 장어, 갈치 굴 등의 산란지로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그 당시는 식량을 생산하기 위하여 간척지로 막았던 것이다.

 일성산은 해남군 서북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북쪽으로 목포 유달산과 동쪽 월출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다도해의 풍광이 확 트이고 일몰의 아름다움은 찬탄할 만하다. 남쪽으로는 해남 대흥사와 진도가 환히 보인다.

가을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 정상이 보이기도 한다. 조용하고 안전하고 평온한 복받은 땅이다. 바다에서 일성산을 바라다보면 아름답고 웅장하게 놓인 자태가 더 아름답다.

 해남반도의 북쪽에 있는 화원반도는 그동안 내륙으로 진출하는데 교통의 애로가 많았으나 문화의 발달과 국가 경제의 발전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다.

 우수영을 거쳐 울돌목을 지나는 진도대교로 진도를 관광하는 것도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목포로 연계된 목포대교를 거쳐 무안공항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서헤안 고속도로가 서울을 향해 가고 있다. 신안군 도서로 연결된 압해도와 임자도와 여러 섬을 연결하는 천사대교는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다. 차량으로 도서를 다니게 되었다. 앞으로 더욱 활기찬 발전이 전개될 것을 기대해 본다.

 

고당교회 1904년 설립

미국 선교사 변요한 목사와 오웬 목사 그리고 도정이 조사의 선교로 우수영 집회소가 생기고,고대리와 고평리 앞 해변가에붉은 해송이 많이 있어 선교사들이 피서지로 이용하게 도면서 고당리 지역을 계몽시키게 되었다. 영명 학숙이 세워져 신학문을 통해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1902년 김성우, 조병선, 김익천 세분이 우수영으로 다니다가 1904년에 고당리 가정 집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인들이 1906년에 땅을 구입하여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빚을 내기도 하여 일성산에서 팽나무를 베어다가 숯을 구어 팔아 빚을 갚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장을 하셨던 조부이신 김자인께서도 신앙생활은 안 했으나 많이 도와주셨다고 한다. 가을에 너무 바빠서 보리 씨를 뿌리고 덮어주지를못하고 대충 지났는데도 다음 해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1908년 송정현, 정관빈, 김자권 김행우 네분이 옛 믿기로 결의하고 열심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예수를 먼저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구원의 기쁨과 복을 누리는 행복한 땅이 되었다. 복음이 있는 곳에 발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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