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촌계를 조직하다 1959년 11월 28일
오늘 저녁에 장은택, 김재양(후배들)이와 함께 8명이 협촌계를 조직하고 회비를 개인당 금년은 300원씩, 내년에는 200원씩 거출 하자고 하고 춘추로 곡물을수집하여 경사 시에 쓰기로 했다. 기념품은 풍경화 1점, 모자1개, 구두 1켤레 선물로 주기로 했다. 삶의 미래를 갖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조직을 유지시키기 위해 해 본 것이다. 이것 마저 군에 가고 도시로 흩어지다 보니 유야무야 하게 되고 말았다. 약 30호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믿음의 성도들이 많았고 젊은 이들이 무엇이든 의욕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싶었다.
성탄절이 가까워져 가니 주일학교 행사 준비와 청년 찬양 연습에 열심히 같이 해보자고 부탁을 하기도 해 보았다. 1959년 11월 30일 고전리 김윤학 장로님이 소천하셨다. 장례 집례는 우수영교회 이재천 목사님이 하셨다.
방범 방화 예방 야간 순찰 1960년 1월 1일
신정이다. 정부 시책으로 오늘부터 방범 방화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요사이 도둑이 성행하고 있어서 안전 강화 차원에서 시작한것이다. 우리 마을은 제일 아래 세대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3세대가 1개 조로 구성되어 부락의 방 하나를 이용하여 야근을 했다. 소 여물을 준비하는 다근따근한 방에서 세 사람이 모여 밤에 순찰을 하게 되었다.
11시가 되면 목탁을 한 번씩 때리면서 마을을 순찰한다. 두 번째는 새벽 3시에 목탁을 세 번씩 때리면서 순회한다. 세 번째는 새벽 3시에 목탁을 세 번씩 때리면서 순회한다. 세 번 돌고 나면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쉰다. 우리 마을은 지금까지 불순한 일은 한 번도 없는 좋은 마을이었다.
장기실 전도사님이 흑산도 도목 교회로 가시다 1960년 1월 4일
그동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수고하시던 장기실 여전도사님이 흑산도 도목으로 가신다. 흑산도의 작은 섬이다. 고향이 황해도로 6.25 때 남하하신 분이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강단을 지키다 보니 합당하지 않다고 늘 지적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남자 목회자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것 같다.
열심 있는 목회자였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늘 돌봐 주시고 심방도 열심히 하셨다. 그동안 흑산도 전도사님과도 교제를 하면서 그곳 사정도 살펴보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김안식 집사님이 동행하여 수고키로 하였다. 서운하였다. 형편이 그러니 전도사님의 앞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바랄뿐이다.
성경 연구 통신 학교 공과 구입 1960년 1월 15일
어제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우리 부락에는 정미소가 없기 때문에 고평리 이우식(부친 이동복) 공장에 가서 정미를 해 와야 한다. 수레나 리어커가 없으니 지게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보리 1가마, 차조 1가마, 모조 2말을 운반 하니 얼마나 힘들겠나. 세 번을 등에 지고 다닌 것이다. 약 400미터 이상 길이다. 그러나 이것이 농촌의 환경이었다. 정미할 일감이 밀려서 맡겨 놓고 오후에 다시 가서 정미를 마치고 집에 운반도 마쳤다.
오늘은 오전에 집에 있는데 우체부가 주인을 찾는다. 알고 보니 1월 초에 신청한 통신 공과를 보내온 것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엽서로 독려를 하려 했더니 마침 도착된 것이다. 매우 기뻤다. 몇 사람이 신청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더욱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을 다짐해 본다. 무료 구독이다. 신, 구약을 문답으로 된 공부다. 총회 교육부에서 무료로 신청자에게 제공한 것이다.
한국 해양 경비선이 중국어선 공격을 받다 1960년 1월 15일
금요 저녁 구역예배에 참석했는데 윤창후 집사님이 예배를 인도한 후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서해안에서 중공 어선 10척에게 한국 해양 단속 경비정 1척이 포위 공격을 받아 대항을 했으나 무장 중공 어선에게 무참하게 공격을 받아 겨우 나오다가 출동한 한국 경비정이 견인해 오다가 도중에 밧줄이 끊어져 배가 침몰하면서 타고 있던 해경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를 운송하였다고 한다. 추위에 살아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무서운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약한가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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